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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가지 스튜디오/아트 컬렉션

구스타프 클림트 [ Gustav Klimt ] 작품감상

by 솔가지 스튜디오 2015.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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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 Gustav Klimt ] 작품감상

 

 

 

 

 

 

 

 

 

 

 

 

 

 


1862.7.14 ~ 1918.2.6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 출신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이며 판화가였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해 클림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우울했다. 14세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는 1880년대 말경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다.

클림트는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동요를 겪으며,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순수와 응용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다. 1897년 당시 보수적인 미술 단체의 일원이었던 클림트는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칼 몰(Carl Moll),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참여했다.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에 차례로 그린 우의적인 장식화 《철학》, 《의학》, 《법학》은 그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충돌하는 사태를 빚었다. 이 일로 그는 공공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갔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하고는 이에 낙담하고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이른바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실생활에 거리를 두고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지속시켜 나갔다.

클림트는 1918년 1월 11일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은 후, 같은 해 2월 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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