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가 해방을 맞이한 1945년 8월15일 이후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4일까지, 이때만이이라도 조상님들이 잘 처신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늘 갖고 있었다.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때, 서로가 물고뜯고 하지않고 잘 처신했더라면??? 이 생각에 아래의 기사를 펌해왔습니다.
▲ 1948. 8. 15.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정부 수립 경축식 ⓒ NARA
1945년 8월 15일
1945년 8월 15일, 그 무렵 국내외 동포들은 일본이 패망하면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고. 곧장 자주 독립국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8․15 해방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국토 분단이라는 비극에 직면하게 됐다.
1945년 8월 15일 그날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遠藤)는 일본의 항복을 미리 알았다. 그는 조선에 있는 80여만 명의 일본 민간인과 군인의 신변보호 및 안전 귀국을 위해, 국내 지도급 인사인 여운형·송진우 등과 행정 이양 교섭을 벌였다. 그 결과, 송진우 측이 이에 불응하자 여운형에게 행정권을 넘기기로 약속했다.
몽양 여운형은 일본이 패망할 줄 알고는 비밀리에 조직했던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8월 15일과 16일 정치범을 석방하고, 치안대를 조직하는 등 발 빠른 건국 활동을 시작했다.
▲ 1945. 8. 휘문학교 교정에서 새나라 건설 포부를 밝히는 몽양 여운형 선생 ⓒ 여운형 기념사업회
하지만 8월 16일 조선총독부는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할 것이라는 정보가 확실해지자 일방으로 건국준비위원회에 행정권 이양할 약속을 거둬들인 뒤, 9월 11일 미 군정청이 정식으로 생길 때까지 조선총독부 본래의 권한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이는 우리 겨레에게 이름만의 해방인 것으로, 또 다른 외세에 휘둘리는 결과를 낳게 됐다. 일제에서 벗어난 8․15 광복의 기쁨은 단 하루뿐이었다. 조선인의 자주 독립 정부수립은 무척 험난한 국면에 처할 것임이 예고됐다.
이에 앞서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얄타 회담의 결정에 따라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다. 소련군은 만주의 관동군을 쳐부수며, 함경도 나진·청진 등지에 상륙했다. 그러자 미국은 예상보다 재빠른 소련의 남하 속도에 놀랐다. 그대로 두면 한반도 전역을 소련이 점령할 것 같았다. 다급해진 미국은 소련에게 북위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소련이 쉽게 동의하자 우리나라는 해방과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분단이 된 처지가 됐다.
▲ 1945. 9. 9. 서울에 진주한 미군을 서울시민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 NARA
우리 겨레는 뒤늦게야 국토의 허리를 자르는 38선의 실체를 알고는 망연자실했다. 이 38선은 두고두고 우리 겨레에게는 원한의 선이요, 한국전쟁 이후에는 '휴전선(DMZ)'이라는 이름으로, 국토를 두 조각내는, 내 땅인데도 오도가도 못하는, 단장의 선이 됐다.
1945년 8월 15일, 여운형과 안재홍이 구성한 조선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의 지부가 생겨날 만큼 그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고,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도 인민정권을 세우고자 박차를 가했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은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끼리 정부를 만들어 놓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건국됐음을 선포했다. 한편 송진우와 김성수 등은 조선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치 않고,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결성해 조선인민공화국에 맞섰다.
▲ 날짜 미상. 북위 38도선 경비 초소를 미군이 지키고 있다. ⓒ NARA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로(阿部信行)부터 항복문서를 받은 뒤, 9월 11일부터 정식으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정하거나 무시한 채, 그들이 직접 북위 38선 이남의 한반도를 통치했다. 이런 가운데 해외에서 활동했던 민족지도자들이 잇따라 귀국했다. 10월 16일 미국에서 이승만이, 11월 23일에는 김구·김규식 등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소련 극동에 체류 중이던 김일성, 김책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88여단)는 원산항으로 귀국하는 등, 북한에도 귀국 동포들이 줄을 이었다. 일제의 압박에서 풀려난 조선 백성들은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 차 그 무렵 해방 정국에는 수많은 정당과 단체가 등장했다. 날이 새면 정당이나 단체가 하나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 1945. 9. 9. 서울, 서울에 진주한 미군들을 시민들이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 NARA
1945년 12월 미국과 소련, 영국의 외상(외무장관)은 소련 모스크바에 모여 한국 문제를 협의했다. 이 회의는 1943년 카이로에서 맺은 미·영·중 삼국 대표가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할 것을 결정"한 약속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 데 대해, 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점령할 목적으로 5년간 신탁통치를 제안했다"고 보도해 한순간에 온 나라가 신탁통치 찬반 회오리바람에 휩쓸렸다. 뒷날 밝혀진 바, 그때 <동아일보>의 보도는 오보로 신탁통치를 제안한 쪽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고,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서는 미국과 소련의 제안을 절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과 소련은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이 위원회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구성케 한 다음, 미국·소련·영국·중국 등이 임시정부와 협의하면서 최고 5년 이내로 한국을 신탁통치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좌우 정치세력 모두 이 신탁통치 반대 의사를 밝혔으나, 곧 중도파와 좌파 진영은 이 회의의 결정서를 자세히 확인한 뒤 신탁통치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
▲ 1946. 3. 1. 서울. 신탁통치 지지 궐기 대회로 가마니를 펼쳐 구호를 쓴 프래카드가 이색적이다 ⓒ NARA
▲ 1946. 3. 서울. 미소공동위원회의장인 된 덕수궁 석조전(국기게양대에는 왼쪽부터 미 성조기, 태극기, 러시아기가 걸려 있다. ⓒ NARA
▲ 1946. 3.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스티코프 러시아대표가 연설하고 있다(왼쪽은 주한 미 주둔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 ⓒ NARA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회의는 순조롭지 못했다. 우파의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미소 두 나라 대표가 임시정부 수립 논의에 참가할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을 둘러싸고 양보 없이 대립했기 때문이다. 두 달 남짓 끌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끝났다.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파는 좌우합작 정부를 추진했으나 크게 힘을 얻지 못했다. 이는 외세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자적인 무리들이 많았던 탓이다. 이는 우리 겨레가 앞으로 자주적 통일국가를 세울 때도 또다시 부딪칠 당면한 문제일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46년 2월 북측에서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됐고, 남측에서도 그해11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선출했다. 이런 정국에 재빨리 미국의 복심을 눈치챈 우파의 이승만은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그러자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좌파에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1946년 9월 총파업에는 전평(全平, 조선노동자조합 전국평의회) 산하 조합원에 학생과 일반 대중이 가세해 25만여 명이 참가했다.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민중 항쟁은 삽시간에 경상남북도로 퍼져나갔고, 계속 전국으로 번졌다.
▲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일 날 광화문 일대 ⓒ NARA
1947년 5월, 1년 만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렸다. 하지만 미소공위 회의는 또다시 두 달 만에 성과 없이 끝났다. 미소가 합의해서 통일정부를 세우자던 모스크바 합의는 물거품이 됐다. 미소 두 나라는 자기들 입맛에 맞는 친미-친소정부를 세우려는 복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1947년 9월,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문제를 유엔을 통해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소련은 이에 반대하며, 두 나라 군대가 동시에 철수해 한국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고 미국에 제안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다수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했으나, 소련은 이들의 북한 방문을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유엔 소총회의 결의로 38도선 이남에서 단독선거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민족지도자들은 나라의 분단을 막고자 남북협상 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남쪽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이 중심인물이었다. 1948년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했다. 이에 북의 양 김씨가 호응함으로써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이미 분단으로 치닫고 있는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외세에 편승해서 자기 이득을 얻으려는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1948. 4. 평양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 일행이 돌아오고 있다(가운데 김구 선생, 왼쪽 아들 신, 오른쪽 선우진 비서). ⓒ 백범기념관
1948년 2월 7일, 이남에서는 남로당의 제안으로 대규모 단독선거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그해 4월 3일, 무장투쟁 형태로 단독선거 반대 투쟁이 일어나 선거구 세 곳 가운데 두 곳에서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군인과 경찰이 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숱한 제주도민을 희생시키는 불상사를 초래했다.
▲ 1948. 5. 8. 전남 광주, 5. 10 선거 방해를 예방코자 경찰이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 ⓒ NARA
▲ 1948. 5. 10.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에서 한 유권자가 기표 후 투표함에 넣고 있다. ⓒ NARA
▲ 1948. 5. 10.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장에서 기표하고 있다. ⓒ NARA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돼 모두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5월 31일에 열린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어, 7월 17일에 공포하고, 이어 7월 20일에는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했다.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한 이래 실로 길고도 험난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통일된 정부가 아니고 38선 이남만의 정부였다.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에서도 그해 8월 25일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북한 헌법을 채택한 뒤,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38선 이남에는 '대한민국'이, 38선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워졌다. 원래 한 나라였던 한반도 조선에는 일제강점기 후 또 다른 외국 군대의 주둔으로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친미-친소 이 두 개의 이질적 정부는 그 출발부터 첫 단추를 잘못 채웠다. 이렇게 탄생한 두 정부는 출발부터 동족상잔의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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